권태, 도파민 중독, 다이나마이트

 "권태는 반혁명적이다"



대학생들이 담벼락에 휘갈긴 프랑스 68혁명의 이 슬로건(Guy Debord)은 처음으로 권태가 정치의 장으로 등장한 선언문 같은 것이었다. 권태는 순응주의, 관료주의, 관리된 사회, 규격화된 삶과 동의어가 됐다.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의 상상력>에서 영원의 질식 상태인 권태가 강력한 혁명의 도화선이 된다고 보았다.


권태는 개인의 심리 상태를 넘어 하나의 사회 정치적 현상처럼 다가왔다. 


권태: 실존적 공허에서 사회적 질병으로

19세기 보들레르와 랭보에게 권태는 도시화된 근대인이 마주한 영혼의 마비였다. 보들레드는 권태를 현대인의 질병이라고 했고, 랭보는 권태를 지옥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사물화되고,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세상에서 느끼는 환멸의 공포.




소설가 이상에게 권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의 무게' 같은 것이었다. 그는 시골 풍경의 녹색에서 지독한 반복을 보았고, 그 안에서 질식할 것 같은 근대 지식인의 자의식을 보여주었다.


장 뤽 고다르의 1965년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피에로(페르디낭)가 TV와 소비주의로 가득 찬 파리를 떠나 도피하는 이유는 바로 그 참을 수 없는 권태 때문이다. 도피 끝에 마주한 운명적인 파멸은 권태로부터의 탈출이 가진 폭발성을 보여준다.




AI 시대의 도파민 중독

과거의 권태가 '할 일이 없는 상태', '무기력한 상태'에서 왔다면, 현대의 권태는 '지나치게 많은 자극'에서 온다. AI 시대에 인간의 뇌는 더 이상 권태를 참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방전된 배터리에 대한 불안 심리와 같다.


게임중독과 스마트폰 중독은 자극의 인플레이션이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숏폼 콘텐츠와 AI가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우리 뇌에 끊임없이 도파민을 주입한다. 뇌는 항상성 유지를 위해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게 되고, 평범한 일상의 순간, 즉 순수 권태를 고통으로 인식하게 한다.


발터 벤야민은 권태를 '경험의 알을 품는 꿈의 새'라고 불렀다. 즉, 권태는 사유와 창조가 시작되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AI는 우리가 권태를 느낄 틈을 주지 않고 즉각적인 답과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사유의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들뢰즈적 관점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인의 도파민 중독은 '차이 없는 반복'에 매몰된 상태다. AI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할 만한 것(동일성)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진짜 사건이나 타자와의 조우가 사라진 자리에는 매끄럽고 지루한 충족이 남는다. 그것은 확증편향과 동어반복으로 강화된 나르시시즘이다. 



도파민 중독은 권태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권태라는 증상을 마비시키는 '디지털 마취제'에 가깝다. 마취가 풀리는 순간 마주하게 될 권태와 도파민 금단 현상은 훨씬 더 파괴적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권태는 모든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되는 형벌이다"라고 말했다. 


고다르의 피에로처럼, 우리는 어쩌면 이 거대한 도파민의 바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신만의 '푸른 바다'나 '다이너마이트'를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권태가 단순한 공허함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필수적인 정지 버튼이라면, 우리는 지금 그 버튼을 누를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피에로가 푸른 절벽으로 간 까닭은

피에로는 왜 다이나마이트를 들고 푸른 바다가 펼쳐진 절벽을 찾아갔을까? 권태에 싫증이 난 그가 왜 다시 권태의 풍경을 배경으로 다이나마이트로 자아를 날려버릴 계획을 세웠을까? 


<미치광이 피에로>의 결말은 단순히 치정극이나 범죄물의 '도주 끝의 자살'로 읽히지 않는다. 페르디낭(피에로)이 굳이 그 푸른 바다가 보이는 절벽을 선택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 행위는 훨씬 더 중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페르디낭의 여행은 '부르주아적 권태'에서 '우주적 허무'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페르디낭이 파리를 떠난 이유는 그곳의 언어가 '광고'와 '소비'로만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안느와 함께 도망친 남부의 바다 또한 그에게는 또 다른 감옥이었다. 마리안느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라고 외칠 때, 페르디낭은 책을 읽으며 권태를 견뎌야 했다. 그에게 바다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닿지 않는 거대한 무(無)의 병풍이다.




단지 죄의식 때문이었다면 조용히 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파랗게 칠하고, 다이너마이트를 머리통에 감는다. 이는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최후의 '미학적 저항'이자, 권태라는 정적인 상태를 가장 동적인 폭발로 마감하려는 시도다.



둘째, 다이나마이트는 '페르디낭'과 '피에로'의 분열과 통합을 위한 기폭제다. 마리안느는 그를 계속 '피에로'라고 부르지만, 그는 매번 "내 이름은 페르디낭이야"라고 정정한다. 페르디낭이 독서하고 사유하며 권태를 관찰하는 자라면, 피에로는 사랑에 눈멀어 행동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자다.




마리안느를 죽인 후, 그는 더 이상 '피에로'로 살 수도, '페르디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다. 다이너마이트는 이 분열된 두 자아를 한꺼번에 소멸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심지어 그는 불을 붙인 직후 곧바로 "바보 같은 짓이야"라며 도화선을 찾아 끄려고 한다. 이 주저함은 그가 죄의식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한 편의 부조리극임을 완성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셋째, 랭보의 '영원'과의 조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페르디낭이 죽고 난 뒤, 화면 위로 랭보의 시구가 흐른다.


"찾았노라.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다."


그에게 바다는 더 이상 권태로운 풍경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을 통해 자아라는 껍데기를 날려버림으로써, 그는 비로소 권태의 근원인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태양과 바다가 하나가 되는 '영원' 속으로 편입된다.


죄의식 이상의 '언어적 파산'과 디지털 디톡스

죄의식에 대해 덧붙이자면, 고다르의 인물들에게 살인은 도덕적 파멸보다는 '소통의 종말'을 의미할 때가 많다. 페르디낭은 마리안느라는 유일한 '타자'와의 소통에 실패했고,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뿐이었다.


권태는 자아가 비대할 때 생기는 질병이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로 그 비대한 자아를 폭파해버림으로써, 권태라는 상태 자체를 물리적으로 소거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가장 처절한 포기인 동시에 권태에 대한 가장 진지한 반역이기도 하다.


당시 68혁명을 앞두고 "상상력에 권력을"이라고 외쳤던 청년들에게, 페르디낭의 이 마지막 폭발은 체제에 편입되어 서서히 말라 죽느니(권태), 차라리 불꽃처럼 산화하겠다는 실존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고다르가 보여준 그 푸른 바다는, 어쩌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스마트폰 액정 속의 무의미한 자극들(디지털 권태)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무의식 바다와도 맞닿아 있는 것 아닐까?


자, 이제 스마트폰을 덮고 디지털 디톡스의 세계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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