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의 ‘아프락사스’를 현대 과학으로 읽는다면?
오늘은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가슴에 품어봤을 문장,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모두 포용하는 신비로운 신 '아프락사스(Abraxas)'.
우리는 늘 싱클레어처럼 알을 깨고 나와 마침내 궁극의 자유이자 자기실현인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해피엔딩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말 그럴까요?
알을 딱 하나 깨뜨린다고 해서 곧바로 온전한 진리와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 고전적인 문학적 상징을 '불확정성의 원리'와 '현대 과학'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실은 아프락사스라는 정착지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마트료시카(러시아 인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말이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아프락사스
현대 양자역학의 문을 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따르면, 미시세계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를 알려고 할수록 다른 하나는 흐려지죠.
이를 우리의 삶과 ‘알을 깨는 행위’에 대입해 보면 기가 막힌 비유가 됩니다.
위치를 알면 운동량이 흐려진다
내가 오랜 고민 끝에 기존의 가치관(알)을 깨고 나와 나의 정체성을 명확히 확립하는 순간(위치 파악),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의 우주와 세계관은 도리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지고 불확실해집니다(운동량의 불확정성).
결국 현대 과학의 시선으로 보면, 아프락사스는 고정되어 있는 궁극의 종착지가 아닙니다. ‘내가 관측하고 선택할 때마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불확정성 그 자체’에 가깝습니다. 알을 깨는 것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거대하고 새로운 불확정성을 마주할 용기를 내는 과정인 셈입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알, '프랙탈 구조'와 마트료시카
러시아의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를 열어보신 적이 있나요? 인형을 열면 똑같이 생긴 더 작은 인형이 나오고, 그걸 또 열면 더 작은 인형이 무한히 반복되죠. 현대 수학과 카오스 이론에서는 이를 '프랙탈(Fractal) 구조'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확대해도 전체와 닮은 구조가 끝없이 반복되는 '자기 유사성'을 뜻합니다.
싱클레어가 마주한 현실도 사실은 프랙탈, 즉 마트료시카였습니다.
첫 번째 알: 가족과 학교라는 안락하고 위선적인 세계
두 번째 알: 그 경계를 깨고 나간 사회와 국가라는 세계
세 번째 알: 더 나아가 인류와 지구, 그리고 거대한 역사라는 세계
알을 하나 깼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눈앞에는 더 거대하고 정교한 다음 단계의 알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프락사스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쩌면 아프락사스는 도달할 수 있는 물리적 목적지가 아니라, 무한히 연속되는 프랙탈 구조의 ‘수렴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끝없이 알을 깨게 만드는 근원적인 동력, 그 자체가 바로 아프락사스인 것이죠.
정치·사회·문화로 보는 '해방의 역설'
이 과학적 비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정확히 관통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거대한 껍질 깨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왕정과 신분제라는 알을 깨고 나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신세계를 맞이했죠. "드디어 아프락사스에 도달했다!"라고 외치려는 순간, 현대인들은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 불평등, 그리고 알고리즘의 지배라는 훨씬 더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 마트료시카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의 모순(알)을 해결하면, 그 해결책이 다시 새로운 체제가 되어 인간을 구속하는 ‘해방의 역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알을 깨야 하는가?
과거 헤르만 헤세가 살던 시대의 아프락사스가 이분법을 초월한 종교적·형이상학적 구원이었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프락사스는 "정해진 답이 없는 무한한 불확정성의 세계를 항해하는 인간의 영원한 운동성"으로 재정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실이 설령 끝없는 마트료시카 구조라 할지라도, 안에 갇혀 고여있는 삶보다 다음 단계의 불안정과 모순을 기꺼이 마주하며 껍질을 깨 나가는 삶이 훨씬 역동적이고 아름다우니까요.
알을 깨는 행위는 끝이 아니라, "나는 다음 단계의 불안정도 기꺼이 즐기며 성장하겠다"는 내 삶을 향한 가장 주체적인 선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크기의 마트료시카 인형 속에서 자신만의 알을 깨고 계시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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