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맨(Gentleman)의 어원과 토크빌: 혁명 vs 개혁

영국식의 점진적 개혁과 프랑스식의 폭발적 혁명, 그 거대한 역사의 갈림길을 단어 하나의 궤적으로 추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젠틀맨이라는 단어 뒤에 한 사회의 성패를 가른 거대한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믿어지시나요?


언어는 사회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기록하는 거울입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그의 명저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에서 프랑스어 쟁티욤(Gentilhomme)이 영국으로 건너가 젠틀맨(Gentleman)으로 진화한 과정을 추적하며, 두 나라가 왜 서로 다른 역사의 길을 걸었는지 날카롭게 파헤쳤습니다.


오늘은 이 단어의 어원적 이동을 통해 프랑스의 폭발적 혁명과 영국의 점진적 개혁의 차이를 짚어보고, 프랑스의 역사학자 앙드레 모루아의 통찰을 더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읽어보고자 합니다.


어원의 출발과 변형: 쟁티욤에서 젠틀맨으로


젠틀맨의 어원은 프랑스에서 시작됩니다. 쟁티욤은 라틴어 젠틸리스(Gentilis, 가문·종족에 속한)와 호모(Homo, 인간)가 결합한 말로, 철저하게 출생과 혈통에 의해 결정되는 귀족 신분만을 가리키는 닫힌 단어였습니다.

몰리에르가 17세기에 루이 14세를 위해 만든 풍자 희곡으로,
귀족이 되고 싶어 하는 평민의 이야기를 다룬 <Le Bourgeois Gentilhomme>

이 단어가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으로 유입되면서 영어식인 젠틀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초기 영국에서도 이 단어는 프랑스처럼 '좋은 가문의 남성'을 뜻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영국의 젠틀맨은 프랑스의 쟁티욤과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토크빌의 통찰: 단어의 문턱을 낮춘 영국, 성벽을 쌓은 프랑스


토크빌이 주목한 지점은 바로 이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의 범위, 즉 외연의 확장이었습니다.


영국은 상업이 발달하고 계급 간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세기가 바뀔 때마다 젠틀맨이라는 단어의 문턱은 사회 하층을 향해 조금씩 낮아졌습니다. 귀족에서 대지주로, 다시 상류층과 지식인으로, 나중에는 피와 상관없이 교양과 인품을 갖춘 모든 남성을 뜻하게 된 것입니다. 평민 엘리트들을 체제 내로 포섭하는 유연한 언어적, 사회적 완충 지대가 존재했던 셈입니다.


세기가 바뀔 때마다 젠틀맨이라는 단어의 문턱이 사회 하층을 향해 조금씩 낮아졌던 영국에서는
나중에는 혈통과 상관없이 교양과 인품을 갖춘 모든 남성을 가리키게 됐다.


반면 프랑스의 쟁티욤은 혁명 직전까지도 오직 혈통이라는 엄격한 기준에 묶여 있었습니다. 가문이 아무리 몰락해도 귀족은 쟁티욤이었고, 평민이 아무리 부유해져도 결코 쟁티욤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자면 쟁티욤은 세습귀족에 가까운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어의 뜻을 꽁꽁 묶어둔 채 배타적인 특권을 유지하려 했던 프랑스의 신분제는 결국 거대한 계급 간의 충돌을 낳았습니다.

붉은 코트와 삼각모자를 쓴  18세기 쟁티욤의 초상화

혁명 vs 긴 개혁, 그리고 앙드레 모루아


이 현상을 두고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앙드레 모루아(André Maurois)는 그의 저서 《영국사》에서 영국인 특유의 타협 정신과 점진적 개혁 성향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짚어냈습니다.


"영국인들은 결코 추상적인 원칙을 위해 현실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제도적 모순을 한 번에 뒤엎기보다는, 기존의 틀을 조금씩 늘리고 수정하여 새로운 계급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모루아의 지적처럼, 영국은 프랑스처럼 단번에 모든 체제를 전복하는 극단적인 혁명 대신, 젠틀맨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넓혀가듯 제도를 유연하게 수정하는 긴 개혁의 길을 걸었습니다. 기존 질서가 신흥 세력에게 문을 열어주고 타협했기에, 영국은 피비린내 나는 단두대의 비극 없이도 근대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단어들은 안녕한가


토크빌과 모루아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기득권 체제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외부의 진입을 막을 때 사회는 폭발(혁명)하지만, 유연하게 경계를 넓히고 새로운 구성원을 포섭할 때 안정적인 발전(개혁)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언어학과 역사학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단어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 계층이나 집단만을 대변하는 배타적인 성벽을 쌓고 있지는 않은지, 쟁티욤과 젠틀맨의 역사적 대조가 주는 교훈을 무겁게 되새겨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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