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의 구별짓기로 본 유튜브 정치 소비의 허상

당신의 정치 취향은 과연 당신 것인가

매일 아침 출근길이나 퇴근길, 스마트폰을 켜고 특정 정치 유튜브 채널을 듣는 것이 일과인 분들이 많습니다. 대형 정치 채널의 영상을 소비하며 사회 이슈를 파악하고, 스스로를 사회 변화에 동참하는 깨어 있는 시민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그 세련되고 정의로운 정치 취향은 정말 온전히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내 취향의 숨겨진 지배자, 아비투스(Habitus)

부르디외는 그의 명저 구별짓기(La Distinction)에서 개인의 취향이 결코 우연이거나 독립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를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아비투스(Habitus)란?

개인이 속한 사회적 계층과 환경에 의해 오랜 기간 체화된 구조화된 성향, 가치관, 행동 양식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자라온 환경과 교육 수준, 즉 문화자본이 내 무의식 속에 남긴 취향의 지문과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유튜브 채널을 볼지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이러한 문화 취향이야말로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계층화된 결과물이라고 지적합니다. 상류 계층은 그들만의 고상함으로, 중산층은 그들만의 세련됨으로 서로를 구별 지으며 끊임없이 다른 계층과 경계를 세우려 합니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 취향에도 계층이 있습니다. 바흐의 평균율은 화이트칼라의 고상한 취향을 의미하는 반면,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블루칼라의 취향을 의미합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관계 없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위치지어진다는 뜻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문화자본의 스테레오 타입

이 구별짓기의 메커니즘은 현대 한국 사회의 정치 지향과 미디어 소비 방식에도 그대로 투영됩니다.

대형 정치 유튜브를 구독하고 몰입하는 행위는, 단순히 정치적 정보를 얻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취향 소비입니다. 비판적 시각을 공유하고 해학적인 정치 풍자를 즐기는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스스로를 대중문화보다 한 단계 높은 의식을 가진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정체성으로 포장하는 것이죠.

그러나 냉정하게 바라보면, 이는 문화자본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진부한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특정 채널을 소비하는 행동 자체가 곧바로 나의 도덕적 우월성이나 정치적 주체성을 담보해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허상, 그리고 면죄부라는 최면

결국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 달콤한 위안을 주는 이데올로기적 허상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짜놓은 편안한 에코체임버(반향실 효과) 안에서 나도 사회를 걱정하고 행동하는 시민이라는 만족감만 얻은 채, 정작 현실을 바꾸기 위한 실천적 고민은 멈춰 서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분노: 채널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댓글을 다는 것으로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합니다.

죄책감 없는 일상: 복잡하고 모순적인 현실 정치의 문제들을 유튜브가 제공하는 손쉬운 프레임으로 소비하며, 일상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부채감을 깨끗이 털어냅니다.

특정 정치 유튜브 채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가도록 스스로에게 거는 고도의 심리적 최면 도구일지도 모릅니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취향의 덫에서 벗어나기

부르디외가 구별짓기를 통해 폭로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주체적이라고 믿는 취향 속에 숨겨진 권력 관계와 무의식적 순응이었습니다.

내가 매일 소비하는 정치 콘텐츠가 정말 나의 독립적인 사유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과 도덕적 우월감을 사기 위한 문화적 소비재인지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진정한 깨어 있음은 선명하게 가공된 유튜브 화면 너머, 익숙한 취향의 바깥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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