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세계를 하나의 게임으로 치환한다면, 개인들은 체스판의 말들처럼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참가자들(말들)을 독려해 추동시킬 강력한 욕망의 대상이 필요하죠. 그것은 십자군 원정의 예루살렘 탈환(천년왕국 건설),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식민주의), 공산주의 혁명(계급 없는 사회) 같은 이데올로기로 나타납니다.


혁명의 시대가 지나가버린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더욱 강력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것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명명했으며, 직관적으로 정의하자면 "우리가 그것이 허상임을 뻔히 알면서도, 행동으로는 마치 진실인 것처럼 믿고 따르는 무의식적 환상"을 의미합니다.


지젝은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한다"였다면,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그들은 자신자들이 하는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지배 이데올로기의 지식이나 가치를 순진하게 믿지 않습니다. 다들 속으로는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죠. 하지만 행동만큼은 여전히 그 시스템을 충실히 지탱하고 있는데, 지젝은 바로 이 지점에 이데올로기의 정수가 숨어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와 화폐

우리는 종이 쪼가리나 디지털 화면의 숫자가 본질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금전적 가치라는 것이 사회적 약속이 만들어낸 환상(허상)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은행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그 종이와 숫자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노동합니다. 머리로는 "돈은 허상이다"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할지라도, 우리 몸의 실제 행동은 "돈은 절대적인 가치다"라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이죠.


친환경 마케팅

또 다른 예로 친환경 마케팅을 들 수 있어요. 많은 소비자가 텀블러를 사거나 친환경 마크가 붙은 제품을 소비합니다. 사실 머리 한구석에서는 '내가 이 텀블러 하나 더 산다고 해서 지구가 드라마틱하게 구원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마케팅으로 부풀린 환상이라는 것도 눈치채고 있죠.

하지만 우리는 그 친환경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나는 지구를 위해 할 일을 했다"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소비 행위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계속 이어갑니다. 허상임을 알면서도 그 환상에 동참해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는 행동이죠.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란, 그 자체로 대단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행동이 그것을 마치 대단하고 신성한 것처럼 대접해 주기 때문에 유지되는 이데올로기적 구심점을 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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