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OPE - 아쉬운 완성도 속 뜻밖의 미학
많은 기대를 모았던 영화 HOPE 관람. (스포 주의)
결론부터 말하면, 탄탄한 완성도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냉정하게 말해 '실패작'에 가까운 작품이다.
숨가쁘게 이어지는 액션은 어느 순간부터 좀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삐딱한 스토리와 겉도는 캐릭터들
영화의 강렬한 시작부터 외계 괴물의 모습이 등장하기 직전까지 이어지는 스릴과 긴장감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외계 괴물의 진격이 시작되면서 스토리도 혼란에 빠진다.
범석(황정민)이 상처 입은 외계 괴물을 추적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표출한 연민의 감정은 어쩌면 후속편에 대한 복선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감정이 정립되지 않는 관객들에게 확실히 혼란을 선사한다.
등장인물들도 왠지 갈 길을 잃은 캐릭터로 보일 때가 많다. 나름 절제와 비폭력주의로 등장했던 성기(조인성)는 동료들이 외계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순간 광기에 사로잡혀 완전히 폭력적인 캐릭터로 변신해버리고, 성애(정호연)는 에일리언을 처단하는 여전사처럼 화려하게 등장하지만 중반부 이후로는 소리만 빽빽 지르는 치어리더 같은 캐릭터로 퇴락한 모습이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력적으로 다듬어질 수 있었던 인물들이 스토리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각자 겉도는 느낌을 준다. 인물들의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보니 관객들이 자꾸 영화 밖으로 나갈 틈을 만들어 준다.
나름 시간을 할애한 코믹 장면도 효율성이 떨어져 보인다.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넣은 듯한 유머 코드 앞에서 관객들은 어정쩡한 상태가 되기 일쑤. 시나리오의 허술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매력적인 한반도의 반공 SF 공간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인 1970~80년대의 고립된 시골 마을인 '호포항'이다. 이는 마치 반공 사상이 싹트던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할리우드에서 창궐하기 시작했던 외계인 침공 영화를 연상시킨다.
반공사상의 최후의 격전지인 1970~80년대 남한의 외딴 마을을 외계인이 방문하는 SF 공간과 이종 결합하는 감독의 세계관은 꽤 흥미롭고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하다.
어촌 마을인 호포항도 곳곳에 '간첩을 때려잡자'는 포스터와 현수막이 나부끼고, 외부의 침투에 대해 주민들도 언제든 결사항전의 대비 태세를 갖춘 곳이다. 외부 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해, 마을의 노인들이 출처도 모를 총기류들을 트럭에 잔뜩 싣고 달리며 사방으로 총알을 난사하는 장면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의 강한 전염성을 SF로 승화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한반도가 이러한 반공 클리셰가 통용될 수 있는 마지막 은신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계 거대 함선의 추락과 산야의 녹아내림은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된 한반도 핵공포를 건드린다.
그럼에도 건질만한 압도적인 비주얼
스토리의 빈틈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눈을 사로잡는 요소가 바로 미술과 촬영이다. 이 영화를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스토리의 영화가 아니라 미장센의 영화로 본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영화다. 영화 속 공간 디자인과 오브제, 색감의 조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미술 감독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외계 괴물에 의해 폐허가 된 마을의 황폐한 공기와 '험한 것'이 숨어 있는 숲속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포착한 카메라 무빙과 조명도 탁월하다. 홍경표의 카메라는 서사의 비약과 빈틈을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감각적인 영상미로 커버했다.
군더더기를 뺀다면...
영화 전반에 거쳐 군더더기가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만일 2시간 36분(156분)이라는 러닝타임을 2시간 혹은 1시간 30분으로 줄였다면 어땠을까?
관객들의 가장 흔한 영화평은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본 거지?"라는 반응이다.
어쩌면 영화 종반부, 외계인의 거대 함선이 갑자기 지구에 추락하고 산야 곳곳이 불타오를 때, 목적지 없이 도로를 질주하는 범석(황정민)이 성애(정호연)에게 던진 말에 영화의 본질이 담겨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 상황이 정리가 안 돼"
이 대목에서 다시 히치콕의 순수 영화(Pure Cinema)와 꿀레쇼프 효과가 떠오른다.
중요한 것은 덧붙이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영화HOPE #HOPE리뷰 #영화솔직후기 #영상미좋은영화 #영화미술 #영화비평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