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아이맥스에 담은 반전(反戰)과 귀향의 서사시



자아를 찾아가는 모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2억 5000만 달러라는 거대 자본을 투입해 고대 지중해의 파도를 스크린에 옮겨왔을 때, 대중이 기대한 것은 아마도 압도적인 고대 블록버스터 스펙터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73분간의 압도적인 아날로그 인상주의를 거쳐 눈앞에 도달한 진짜 피날레는, 거대한 전쟁이 낳은 비극에 대한 깊은 탄식이자 인류 문명 전체를 향한 서늘한 반전(反戰) 메시지였습니다.


1954년 마리오 카메리니 감독의 <율리시즈 Ulysses>가 신화적 영웅의 강인한 의지와 가부장적 질서의 회복에 집중했다면, 놀란의 <오디세이 Odyssey>는 고대 서사시의 뼈대를 빌려 '문명의 근원적 기만'과 '전쟁이라는 비극적 트라우마'를 파헤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Hollywood 역사상 가장 고독한 '귀향 전문 배우', 맷 데이먼이 서 있습니다.



맷 데이먼의 '귀향 잔혹사': 영웅의 탈을 벗은 오디세우스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는 곧 '귀향과 정체성을 향한 처절한 표류의 역사'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참혹한 전장에서 생존해 집으로 가야 했던 어린 병사,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스스로의 정체성과 근원(집)을 찾아 피투성이가 되어 달렸던 요원,

<마션>에서 화성이라는 완벽한 고립 상태 속에서도 흙을 일구며 지구로 돌아갈 날을 집요하게 계산했던 우주비행사.


놀란 감독은 맷 데이먼이 쌓아 올린 이 고독한 표류자의 이미지들을 고대 지중해의 한가운데로 그대로 소환합니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오디세우스는 강철 같은 영웅이 아닙니다. 전쟁이 준 트라우마로 피폐해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열망 하나로 견디지만 그 과정에서 영혼이 마모되어가는 지독하게 인간적이고 고독한 표류자입니다.




계몽의 시작과 기만: 주체는 어떻게 고통받는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서구적 이성과 주체(Ego)가 탄생하는 최초의 인물'로 보았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신들과 대자연(키클롭스, 세이렌)을 이겨내는 방식은 물리적 힘이 아닌 '이름을 속이고(아무도 아니다), 자신을 돛대에 묶어 욕망을 제어하는' 자기기만과 계산성이었습니다.


1954년작 <율리시즈>에서, 커크 더글러스의 율리시즈는 명석함과 육체적 강인함으로 신들을 극복하는 마초적 영웅으로 그려집니다.


놀란의 <오디세이>에서 목마라는 거대한 거짓말로 트로이를 함락시킨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의 지략은 승리의 찬가가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그리스 군과 트로이군의 전사, 그리고 트로이 주민의 피비린내나는 대량학살. 오디세우스는 <마션>의 와트니처럼 전쟁 승리와 귀향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지만, 그 계산과 기만의 대가는 10년의 방랑이라는 참혹한 징벌입니다. 자연과 신을 속이고 승리한 계몽적 이성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긴 고통과 고립 속에 가두게 됩니다.




제우스의 법: 로고스(Logos)와 노모스(Nomos)의 충돌

고대 그리스에서 제우스는 '제우스 크세니오스(Zeus Xenios: 이방인과 손님을 수호하는 신)'로서, 타자를 환대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우주적 질서인 로고스(Logos: 자연법/보편적 이성)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전쟁은 국가와 명분이라는 인위적인 노모스(Nomos: 실정법/정치적 관습)를 세워 이 신성한 로고스를 유린합니다.





예를 들어, 트로이 목마는 제우스의 신성한 제물인 척 위장하여 상대의 환대(로고스)를 이용한 인간의 간교한 노모스였습니다. 목마를 통한 트로이 함락은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는 정당한 지략이 아닌, 신들의 관점에서는 신성한 보편 질서를 무너뜨린 인간 이성의 배덕과 몰락일 뿐입니다.


오디세우스의 집을 점령한 구혼자들 역시 제우스의 법(손님 대접의 윤리)을 깨트리고 주인의 재산을 침탈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이들을 단죄하는 방식 역시 피의 복수라는 또 다른 폭력적 노모스로 치달으며, 영화는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가 어떻게 보편적 신성(로고스)을 왜곡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문명 파괴에 대한 연민과 자기반성

놀란의 오디세우스가 헤매는 지중해는 스펙터클한 모험의 공간이 아닙니다. 테렌스 말릭 감독의 <씬 레드라인>(1998)에서 아름다운 태평양의 자연과 대비되던 인간들의 잔혹함처럼, 놀란의 카메라는 눈부시게 투명한 지중해의 태양 아래 펼쳐지는 문명 파괴의 참상을 서늘하게 비춥니다.

영화 후반부, 트로이의 불타는 궁전과 이타카 궁전에 자행되는 피의 복수극을 고찰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정통 영웅극의 카타르시스를 철저히 배제합니다. 승리자나 패배자나 모두 잔혹한 전쟁 기계가 되어버린 현실, 인간이 쌓아 올린 도시와 규범이 욕망과 폭력으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에 대한 깊은 생태적 연민과 자기반성이 화면을 채웁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기기 위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의 고대적 변주이자, 본 시리즈에서 자신이 만든 폭력을 깨달아가는 제이슨 본의 고뇌와 맞닿아 있습니다.


문명적 귀향(Nostos)을 향한 여정

1954년의 <율리시즈>가 승리하고 돌아와 아내를 구하고 왕좌를 되찾는 마초적 영웅의 신화였다면, 2026년 놀란의 <오디세이>는 영웅주의라는 헛된 신화를 해체하는 거대한 반전 서사시입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려 수많은 전우가 죽어 나갔듯, 맷 데이먼의 오디세우스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부하와 청춘을 바다에 묻어야 했습니다. 2억 5000만 달러라는 거대 자본이 도달한 지점은 승리의 쾌감이 아닌,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려는 인간의 비극적 고뇌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영화사 최초로 전체를 아이맥스 카메라로 담았지만, 스펙타클해 보이지 않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초월해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 처절한 집착은, 기만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간 문명이 다시 정직한 인간성과 평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명적 귀향'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을 대변합니다.


신들의 주술적 세계에서 벗어나 강력한 주체로 우뚝 선 인간이 어느덧 '씬 레드 라인'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그가 꿈에도 그리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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